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말갈족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특유의 경제활동을 통해 넓은 지역과 교류한 실력 있는 자생 집단이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교역 활동은 말갈 사회의 생존 뿐 아니라 발해와 고구려 같은 국가와의 관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문에서는 말갈의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계 방식과 당시 동북아 무역 구조 속에서 의 위치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시계 앞 버튼
말갈족의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은 **수렵(사냥)**이었습니다. 동북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울창한 삼림 지대는 사슴, 멧돼지, 곰, 늑대 등 다양한 야생 동물이 서식하던 곳으로, 말갈인들은 사냥을 통해 식량, 가죽, 뼈, 약재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활과 창, 덫을 사용해 사냥했으며, 눈 덮인 산림지대에서는 설피와 썰매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이동했습니다. 사냥한 동물의 가죽은 방한용 의복과 덮개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발해나 당나라로 무역품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특히 호랑이 가죽과 곰 발바닥 등은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시계 앞 버튼
수렵과 더불어 말갈족은 소규모 목축 생활도 병행했습니다. 기후와 지형상 대규모 유목은 어려웠지만, 소, 양, 말 등 가축을 기르며 이동형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말은 교통 수단이자 전쟁 자산이었고, 양과 소는 식량과 피복 재료를 제공했습니다.
말갈 여성들은 유제품 가공 능력이 뛰어났으며, 젖을 짜서 만든 유청 이나 버터는 중요한 식료 자원이 되었다. 특히 말의 사육과 기마술은 후대 몽골 유목민 보다 먼저 체계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말갈족의 기동성과 생존력을 보여주는 증거 입니다.
시계 앞 버튼
주된 생계는 아니었지만, 일부 말갈 부족은 밭농사와 원시 농경도 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 유역이나 훈춘 평야처럼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는 기장, 조, 수수 등 잡곡을 재배했습니다. 말갈 사회는 기본적으로 유목적 특성을 가졌지만, 계절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숲에서 약초, 열매, 버섯 등을 채집해 일상의 영양을 보충했으며, 이는 자급자족형 경제 구조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시계 앞 버튼
말갈의 경제는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서 교역 경제로 발전했다. 특히 발해 건국 이후, 말갈인들은 발해라는 국가적 틀 속에서 적극적인 교역 활동에 참여했다. 말갈은 가죽, 수렵물, 인삼, 사향, 호랑이 뼈 등을 생산하여 발해의 주요 수출품으로 공급했다.
발해는 이 물품들을 중국(당나라), 일본, 거란, 흑수말갈 지역에 수출하며, 동북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말갈인들은 직접 무역상으로 참여하거나, 수공예품 제작자 및 운반자로 활약했다. 말갈의 활솜씨와 체력은 이들이 장거리 교역로를 개척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시계 앞 버튼
말갈의 경제활동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닌,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핵심 기제였다. 수렵이 중심이 되었던 초기 말갈은 전사 중심의 사회 구조를 보였으나, 발해 건국 이후 교역과 농경, 수공업의 발전으로 계층 구조가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발해에서는 말갈 귀족층이 형성되어,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고, 경제 활동을 통한 지위 상승이 가능했다. 이는 말갈족이 단순한 피지배 민족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계 앞 버튼
말갈족은 거칠고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무역과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킨 민족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기동성과 생활력으로 고대 동북아에서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고, 발해의 경제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말갈의 경제활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히 변방 민족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고대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 말갈의 활력 있고 입체적인 실체를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