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7일 금요일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말갈족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특유의 경제활동을 통해 넓은 지역과 교류한 실력 있는 자생 집단이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교역 활동은 말갈 사회의 생존 뿐 아니라 발해와 고구려 같은 국가와의 관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문에서는 말갈의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계 방식과 당시 동북아 무역 구조 속에서 의 위치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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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은 **수렵(사냥)**이었습니다. 동북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울창한 삼림 지대는 사슴, 멧돼지, 곰, 늑대 등 다양한 야생 동물이 서식하던 곳으로, 말갈인들은 사냥을 통해 식량, 가죽, 뼈, 약재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활과 창, 덫을 사용해 사냥했으며, 눈 덮인 산림지대에서는 설피와 썰매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이동했습니다. 사냥한 동물의 가죽은 방한용 의복과 덮개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발해나 당나라로 무역품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특히 호랑이 가죽과 곰 발바닥 등은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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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더불어 말갈족은 소규모 목축 생활도 병행했습니다. 기후와 지형상 대규모 유목은 어려웠지만, 소, 양, 말 등 가축을 기르며 이동형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말은 교통 수단이자 전쟁 자산이었고, 양과 소는 식량과 피복 재료를 제공했습니다.

말갈 여성들은 유제품 가공 능력이 뛰어났으며, 젖을 짜서 만든 유청 이나 버터는 중요한 식료 자원이 되었다. 특히 말의 사육과 기마술은 후대 몽골 유목민 보다 먼저 체계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말갈족의 기동성과 생존력을 보여주는 증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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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생계는 아니었지만, 일부 말갈 부족은 밭농사와 원시 농경도 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 유역이나 훈춘 평야처럼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는 기장, 조, 수수 등 잡곡을 재배했습니다. 말갈 사회는 기본적으로 유목적 특성을 가졌지만, 계절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숲에서 약초, 열매, 버섯 등을 채집해 일상의 영양을 보충했으며, 이는 자급자족형 경제 구조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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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경제는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서 교역 경제로 발전했다. 특히 발해 건국 이후, 말갈인들은 발해라는 국가적 틀 속에서 적극적인 교역 활동에 참여했다. 말갈은 가죽, 수렵물, 인삼, 사향, 호랑이 뼈 등을 생산하여 발해의 주요 수출품으로 공급했다.

발해는 이 물품들을 중국(당나라), 일본, 거란, 흑수말갈 지역에 수출하며, 동북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말갈인들은 직접 무역상으로 참여하거나, 수공예품 제작자 및 운반자로 활약했다. 말갈의 활솜씨와 체력은 이들이 장거리 교역로를 개척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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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경제활동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닌,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핵심 기제였다. 수렵이 중심이 되었던 초기 말갈은 전사 중심의 사회 구조를 보였으나, 발해 건국 이후 교역과 농경, 수공업의 발전으로 계층 구조가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발해에서는 말갈 귀족층이 형성되어,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고, 경제 활동을 통한 지위 상승이 가능했다. 이는 말갈족이 단순한 피지배 민족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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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거칠고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무역과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킨 민족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기동성과 생활력으로 고대 동북아에서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고, 발해의 경제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말갈의 경제활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히 변방 민족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고대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 말갈의 활력 있고 입체적인 실체를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말갈 여성의 사회적 지위 – 발해 여성 귀족과의 관계

고대 동북아시아의 말갈족은 발해 건국에 있어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핵심적인 주체였습니다. 이들의 문화 중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말갈 여성은 단지 가정 내 역할에 그치지 않고 종교, 정치, 경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말갈 여성의 전통적 지위와 발해 귀족 여성으로서의 변화,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하겠습니다.


말갈 여성의 사회적 지위 – 발해 여성 귀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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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유목과 농경이 혼합된 생활 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사회는 가부장 중심이었지만 여성의 실질적인 영향력 또한 매우 컸습니다.

특히 무속 신앙에서 여성 무당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말갈 여성은 주술, 제사, 치유 행위 등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단순한 가정 보조 역할을 넘어 공동체 지도자급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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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말갈의 문화와 사회 구조는 발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여성의 사회적 위상입니다.

발해에서는 여성도 토지를 소유하거나 사찰을 후원하고, 일부는 귀족 작위를 부여 받기도 했습니다. 말갈 출신 여성들이 발해 상류층에 편입되며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말갈 여성의 자주성 과 활동성이 발해 귀족 여성의 정체성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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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과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 고분과 묘지명 에는 여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여러 기록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 묘는 여성의 교양과 공적 활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 예술, 불교 신앙에 깊이 관여했으며, 묘지명 에는 “지혜롭고 덕망이 높은 공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발해 사회에서 여성이 단순한 ‘가문의 딸’이 아닌 독립적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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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초기에는 말갈 부족과의 연합을 위해 혼인 외교가 자주 이루어졌습니다. 말갈 여성은 단순한 혼인 상대가 아니라 정치적 중재자, 지방 통제의 매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말갈 귀족 여성들이 발해 귀족과 혼인하며 말갈계 혈통이 발해 지배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는 정치적 안정과 부족 간 연합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일부 여성은 자신의 친족 부족과 발해 왕실 사이를 연결하는 외교적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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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여성의 영향력은 단지 고대 사회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리더십, 경제적 기여, 정치적 중재력은 현대 다문화 사회의 여성 리더십 모델로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다민족 국가였으며, 그 안에서 말갈 여성은 고유의 문화와 역할을 지키면서도 발해 귀족으로 통합되는 융합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의 젠더 다양성과 다문화 포용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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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여성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드물게도 주체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발해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핵심적인 역사 주체로 기능했으며, 발해 여성 귀족 문화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사 연구를 넘어, 여성사와 다문화 융합의 역사적 근거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갈 여성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더 넓은 동아시아의 여성 리더십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25년 6월 26일 목요일

말갈 유적지 탐방 – 현재의 중국 지린성과 연변 지역

말갈족(靺鞨族)은 발해 건국의 핵심 세력이자 고대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민족이었습니다.  흑수말갈, 속말말갈 등 다양한 계열이 존재했으며, 특히 속말말갈은 발해 건국의 주역으로 활동했습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말갈인의 삶과 문화가 남아 있는 유적지가 다수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풍부한 말갈 유적지를 중심으로, 고대 말갈의 삶을 현재의 시선으로 탐방해보고자 합니다. 발해와 말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것입니다.


말갈 유적지 탐방 – 현재의 중국 지린성과 연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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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맞닿은 지역입니다. 대조영이 속말말갈 세력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뒤, 이 지역에서 발해를 세웠다는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린성 내 주요 말갈 유적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용두산성: 말갈계 부대가 주둔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대 산성

  • 혼강 주변 고분군: 초기 발해 귀족과 말갈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

  • 고구려성과 연결된 방어시설: 말갈-고구려 간 군사 협력의 흔적

이들 유적은 고구려의 석축 기술과 말갈의 간결하고 실용적인 구조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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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말갈족의 주거지 중 하나로, 흑수말갈이 이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농경과 수렵을 병행하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자연환경이 풍부한 산악과 강 유역은 말갈의 반유목적 문화와도 잘 맞았습니다.

연변의 주요 말갈 유적지:

  • 연길 시 외곽 고분군: 목곽분 형식의 무덤이 집중 분포

  • 도문 일대 취락 유적지: 발해-말갈 초기 공동 거주지로 추정됨

  • 말 장비·사냥도구·청동기 출토지: 말 위주의 생활과 자급자족적 삶을 보여줌

이들 유적은 현지 박물관과 연변대학 등에서 보존·전시 및 학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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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유적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역사에서 말갈족이 단순한 종속 세력이 아닌, 문화와 군사에 있어 주체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말갈 유적이 지닌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다민족 융합의 상징: 고구려·말갈·발해 간 문화적 교류의 현장

  • 기마 문화의 시초: 말갈의 말 관련 유물은 몽골보다 앞선 기술력을 시사

  • 환경 적응력: 산림과 강변에 최적화된 마을 구조, 방어 시설, 생존 도구 등

최근에는 말갈 유적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재조명되며, 중국 내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역사 관광 자원화도 추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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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유적지를 직접 둘러보려는 여행자들을 위한 유용한 팁을 소개합니다:

  • 여행 허가: 지린성과 연변 대부분은 외국인 출입 가능, 국경 근처 일부 지역은 제한

  • 언어: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로 한국어 사용 가능성이 높음

  • 가이드 활용: 현지 박물관 또는 조선족 문화센터에 문의 시 역사 가이드 가능

  • 여행 시기: 4~10월이 적기, 겨울은 매우 춥고 일부 유적 접근이 제한됨

역사를 사랑하는 여행자에게는 말갈 유적지 탐방이 단순한 관광을 넘어, 고대의 시간과 숨결을 마주하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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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발해 건국의 협력자이자, 고대 동북아의 문화 주역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산성, 무덤, 유물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채워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오늘날 지린성과 연변에 남은 말갈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과거의 민족과 현재의 공간이 맞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 말갈의 삶과 숨결이 남아 있는 길 위로 떠나보세요.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말갈족에서 이어진 여진과 만주족의 문화 – 동북아 고대 문명의 연속성

 말갈족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부족 연합체로, 그들의 문화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여진족과 만주족으로 이어지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말갈의 생활 방식, 종교, 사회 제도, 무예 전통은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에게 계승되어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바꾸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에서 시작해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과 현대까지 남아 있는 유산을 살펴보겠습니다.


말갈족에서 이어진 여진과 만주족의 문화 – 동북아 고대 문명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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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주로 만주, 연해주, 간도 지역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고구려 및 발해와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습니다:

  1.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한 정신문화

  2. 수렵과 기마 중심의 생활 방식

  3. 도기 제작과 복식 등 독자적 물질문화

  4. 부족 연합체 구조

이러한 말갈의 사회적 구조와 생활 방식은 이후 여진족의 정치적 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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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경, 말갈족에서 분화된 여러 부족들이 뭉쳐 여진족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들은 송나라와 교역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말갈의 문화를 뚜렷이 계승하였습니다.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샤먼 제사와 조상 숭배의 전통

  2. 말갈식 복장과 무기 사용 (특히 활과 기마 전투 기술)

  3. 부족 중심의 정치 구조

여진은 말갈의 부족 연합체 체제를 발전시켜 강력한 군사력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금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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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년, 아골타가 여진 부족을 통합해 금나라를 세우면서 말갈 문화는 한족 문화와 융합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초기 금나라는 말갈과 여진 전통을 적극 유지했습니다.

  1. 헌사, 사냥제 등 전통 의례 유지

  2. 말갈식 토기와 무기 사용

  3. 샤머니즘 기반의 국가적 제사

이 시기에는 말갈과 여진의 문화가 국가 수준에서 제도화되며, 그 정신이 점차 중화 문명과 섞여가던 과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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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여진족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고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칭합니다. 이후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로 발전,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도 말갈의 문화는 중요한 뿌리로 작용했습니다:

  1. 팔기제도: 말갈 부족 연합체를 모태로 한 군사·사회 조직

  2. 샤머니즘: 청 황실도 중요한 행사에서 샤먼 의례를 수행

  3. 복식, 언어, 기마 전통: 말갈 → 여진 → 만주로 이어진 핵심 문화

  4. 사냥과 조상 제사: 정기 사냥 행사와 조상 숭배가 국가 의례로 제도화

청나라 황실은 이 전통을 “만주의 정체성”으로 내세워 한족과 구분지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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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이 문화의 흔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1. 중국 동북부 소수민족 축제에서 말갈-만주 복식과 전통무예 재현

  2. 샤먼 의식, 조상 제례 등 민속 종교 형태로 전승

  3. 언어 연구를 통한 문화 연속성 확인 (말갈어-여진어-만주어 계보)

  4. 기마 활쏘기, 수렵무예를 보존한 민속 체험 프로그램

이러한 문화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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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단지 고대 부족이 아니라, 여진과 만주족을 거쳐 금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동북아 제국의 뿌리입니다. 말갈의 문화는 정치 제도, 무예, 종교, 복식, 언어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민속 문화와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갈에서 시작된 문화의 연속성은 동북아시아 고대 문명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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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샤머니즘과 종교 – 자연과 혼령이 살아 있는 세계관

고대 동북아의 부족 중 말갈족은 뛰어난 기마 전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지배한 것은 무기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감, 즉 샤머니즘이었습니다. 말갈족은 자연 속에 깃든 정령들과 조상을 숭배하며, 영혼과 대화하는 무당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질서와 치유, 예언을 이끌어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의 샤머니즘이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어떤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는지를 살펴봅니다.


말갈족의 샤머니즘과 종교 – 자연과 혼령이 살아 있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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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종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산, 강, 바람, 불, 동물에 신령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생존과 안녕을 추구했습니다. 사냥 전에는 사냥감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물가에서는 수신(水神)에게 제를 올리는 등, 일상과 신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 숭배는 북방 샤머니즘의 핵심 요소로, 말갈족의 종교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중심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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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 사회에서 무당(샤먼)은 단순한 주술사가 아닌, 영적 지도자, 공동체 치유자, 예언자로서 매우 높은 위상을 지녔습니다. 주로 여성인 무당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길흉을 점치고, 조상신과의 소통을 통해 마을 전체의 안녕을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권위는 없지만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인물로 기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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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계절에 따라 집단 제사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봄에는 풍요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고, 가을에는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례가 치러졌습니다. 이때 무당은 신 내림을 통해 춤, 노래, 동물 희생 제물로 신의 뜻을 전하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불을 피우고 말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은 시베리아와 퉁구스 샤머니즘과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갈의 종교가 북방계 샤머니즘의 원형 중 하나임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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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죽음을 끝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덤에는 도기, 무기, 음식 등을 함께 묻어 사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부 무덤에서는 말을 함께 순장한 사례도 발견되는데, 이는 영혼이 말을 타고 저승을 여행한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조상숭배가 활발했던 말갈 사회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끊임없이 소통하는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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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세웠고, 그들의 종교적 전통은 발해 초기의 국가 의례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발해의 천제(天祭)나 궁중 제의, 고분 벽화 등에는 말갈 특유의 동물적 문양, 자연 숭배 요소가 드러납니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제사용 토기, 동물상은 말갈의 샤머니즘이 국가 체계 안에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갈의 종교가 단지 부족 신앙에 그치지 않고 고대 국가 형성에도 기여했음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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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샤머니즘은 단순한 주술 체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깊은 정신문화였습니다. 이들은 무당을 통해 영혼과 소통하고, 제사를 통해 자연과 공존했으며, 조상과의 연결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말갈의 종교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생태적 사고와 공동체 중심적 세계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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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요일

말갈의 토기와 도자기 – 독자적 문명의 흔적

우리는 종종 말갈을 고대 한국사 속 ‘변방의 부족’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발굴은 이들이 단순한 유목 집단이 아닌, 독자적 문화를 지닌 문명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토기와 도자기 유물은 말갈인의 삶과 신앙,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의 토기·도자기를 중심으로 그들의 문명적 흔적과 독립적 정체성을 재조명합니다.


말갈의 토기와 도자기 – 독자적 문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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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과 상징성의 결합입니다. 흙을 구워 만든 무유(無釉)의 토기는 대부분 회색 또는 적갈색으로, 형태는 항아리, 항아리형 병, 조리용 토기 등으로 구성됩니다.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일부 손잡이나 장식부는 동물 형상을 띠며, 이는 샤머니즘과 관련된 신앙적 요소로 해석됩니다. 토기는 단순한 생활 도구를 넘어, 말갈인의 정신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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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과 연해주 일대의 말갈 고분에서 출토된 도기들은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서, 제사나 장례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뚜껑 위에 소형 토기를 올려놓은 복층 구조의 항아리입니다. 이러한 복합형 도기는 말갈 사회가 제의 문화를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물증입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도기의 구조에 녹아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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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는 고구려나 발해 도자기와 비교했을 때 유약 처리가 없고, 상대적으로 거칠며 원형미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기술 부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중시한 문화적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초기 발해 도자기에서 말갈식 문양이나 형태가 나타나는 점은 말갈이 발해 형성에 문화적 기초를 제공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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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에는 물결무늬, 점렬문, 나선형 선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물, 하늘, 태양, 순환과 같은 자연 현상 또는 종교적 상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바닥에 새겨진 나선 문양은 ‘환생’이나 ‘영혼의 이동’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토기의 문양을 해독하면 말갈인의 우주관과 자연 숭배 사상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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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농경과 수렵·어로를 기반으로 한 복합적 삶을 영위한 자생적 사회였습니다. 그들의 도자기 문화는 주변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인접 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동북아 고대 문명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기능했습니다. 말갈을 문명의 ‘수용자’가 아닌 ‘창조자’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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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토기와 도자기는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그릇 하나하나에는 말갈인의 삶의 방식, 세계관,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고대의 흔적일 뿐이지만, 이들은 당시 사회의 구조와 문화적 깊이를 오늘날에 전해주는 생생한 언어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갈을 단지 변방의 부족이 아닌, 고유한 문명을 이룬 주체로 다시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2025년 6월 23일 월요일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 – 발해 귀족층 분석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융합으로 탄생한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발해의 귀족층은 ‘고구려계’ 위주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과연 말갈족은 단지 피지배 계층이었을까? 실제로 발해의 왕족과 고위 관료들 중에는 말갈계 인물들이 다수 존재했었고, 국가의 핵심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발해 귀족층의 구조와 다민족적 특성을 분석해보겠습니다.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 – 발해 귀족층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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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이었지만, 그의 출신 부족인 속말말갈은 사실상 말갈계였습니다. 이처럼 건국 초기부터 말갈 세력이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나라와 일본의 기록에서도 발해를 ‘말갈(靺鞨)의 나라’로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외부에서 보기에 발해의 정체성이 고구려계뿐 아니라 말갈계의 강한 색채도 지니고 있었음을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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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왕족인 대씨 가문은 흔히 고구려계로만 분류되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그 뿌리를 속말말갈에서 찾습니다. 특히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중국 사서에 ‘말갈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씨 왕조 자체가 말갈적 요소를 기반으로 출발했음을 시사합니다. 이후 대조영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왕위를 이어가며 발해를 통치했었고, 이 과정에서 말갈계 왕족이 공식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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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정교한 관료제를 갖춘 국가였으며, 중앙정부와 지방 관료층에서 말갈 출신이 활약한 기록이 다수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발해의 지방 관료 중에는 흑수말갈·백산말갈 출신 인물들이 발탁되었으며, 이들은 지방 통치와 군사 방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발해가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계를 갖추는 과정에서 말갈 귀족의 통치 역량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 수용이 아닌, 실질적 권력 분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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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속일본기》 등 외교문서에는 발해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명단이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이 명단을 분석해보면, 대씨 외에도 ‘고’, ‘장’, ‘이’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말갈계로 추정됩니다. 특히 발해 사신 중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능숙히 구사한 말갈 출신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어, 국제 외교에서도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갈 귀족층은 단지 내부 통치뿐 아니라 외교적 얼굴로도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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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귀족층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발해의 독자적 색채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발해 불교 사찰 유적이나 고분 벽화 등에서는 고구려 계승 양식과 함께 말갈 고유의 복식, 무기, 의례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특히 여성 귀족 복장에서 나타나는 모피나 금속 장식, 의례에서 사용된 토템 형상은 말갈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입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고구려 후계 국가가 아닌, 고구려와 말갈이 융합된 새로운 국가였음을 뒷받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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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발해에서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니라, 건국의 주체이자 통치의 동반자였습니다. 왕실부터 지방 귀족까지 말갈계 인물들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발해의 정치를 이끌었었고, 외교와 문화의 중심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민족 통치 구조는 발해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고구려 중심으로만 해석하기보다, 말갈계 귀족층의 실질적 기여를 조명함으로써 더 입체적이고 풍부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말갈’을 다시 읽어야 할 때 입니다.




2025년 6월 22일 일요일

말갈족의 말 타는 문화 – 몽골보다 앞섰던 기마술?

‘기마 민족’ 하면 대부분 몽골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몽골 이전, 동북아시아에 말을 자유롭게 타며 전장을 누빈 또 다른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갈족이 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산악 부족이 아닌, 정교한 기마 전술과 말 문화를 보유한 집단으로, 발해 건국과 방어의 핵심 전력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의 말 타는 문화가 어떤 특성과 전통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영향력은 어땠는지 흥미롭게 살펴보겠습니다.


말갈족의 말 타는 문화 – 몽골보다 앞섰던 기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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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靺鞨族)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만주,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여러 부족의 연합체였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외교·군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발해를 건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은 단순한 산간 부족이 아닌, 조직적이고 전투력이 뛰어난 민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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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유목민은 아니었지만, 반유목형 생활방식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넓은 강과 산을 끼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기동성과 효율성을 위해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고 사냥과 이동을 배웠으며, **작고 민첩한 말(왜마)**을 타고 험난한 지형을 빠르게 누볐습니다. **중국의 사서에는 “산과 물을 평지처럼 건넌다”**고 표현될 정도로 그 기동성은 탁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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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전투 스타일은 게릴라전에 가까운 기마 전술이었습니다. 말을 탄 채 숲이나 산 속을 은밀히 이동하다가, 기습 공격 후 신속하게 후퇴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활과 창을 능숙하게 다뤘으며,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고속 사격도 가능했습니다. 특히, 발해 건국 당시 **천문령 전투(698년)**에서 말갈족 기병은 당나라 군대를 무찌르며 결정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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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초원을 중심으로 한 유목 민족이였고, 말갈은 산악지형에 특화된 반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몽골의 기마술은 대규모 전투와 개방된 평지 전투에 유리했지만, 말갈은 좁고 복잡한 지형에서의 기동성과 전술적 유연성이 뛰어났습니다. 말갈족은 단순한 기병이 아닌, 지형을 활용한 전략적 전투 전문가였으며, 이 점에서 몽골보다 앞선 기마술의 원형이라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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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전투뿐 아니라 삶 전체에 말을 활용하는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고분에서 말 장비, 말 그림이 새겨진 토기, 장례 시 말의 뼈를 함께 묻는 유물 등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들의 기마 문화는 발해의 군제와 사회 제도 속에 계승되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 영향이 고려, 조선 시기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즉, 말갈족은 동북아시아 기마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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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단지 말을 잘 탄 민족이 아니라, 기마 전술과 말 문화의 주도자였습니다. 험준한 자연 환경을 활용한 고급 전술,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승마 능력, 그리고 말 중심의 생활문화는 후대 몽골보다 앞선 기마 전통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말갈족은 동북아 역사에서 간과 되어온 기마 문명의 숨은 주역이였습니다. 우리가 말갈족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 입니다.

2025년 6월 20일 금요일

고대 동북아 유목민, 말갈족의 삶 –음식 문화


고대 동북아시아를 누비며 살아간 말갈족은, 흔히 수렵 유목민으로만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식 문화는 단순히 고기를 구워 먹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험준한 산과 거대한 숲, 냉랭한 기후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지혜와 창의성, 그리고 지역 생태계에 대한 통찰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구당서』와 『신당서』, 발해 유적, 고고학 자료 등을 바탕으로 말갈족이 먹고 마시고 저장하던 고대 음식 문화를 재구성해보려 합니다. ‘자연과 공존한 생존 음식학’이 시작됩니다.


고대 동북아 유목민, 말갈족의 삶 –음식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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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음식은 철저히 자연 채집과 수렵, 어로에 의존했습니다. 그들의 주요 식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육류: 사슴, 멧돼지, 토끼, 곰, 산양 등 산짐승이 주 공급원이었습니다. 겨울철에는 사냥 활동이 더 활발했으며, 잡은 고기는 훈연·건조·염장을 통해 저장되었습니다.

  2. 수산물: 말갈족은 동해와 송화강, 우수리강 인근에서 연어·송어·메기류를 잡아 먹었습니다. 특히 산란기에는 대량 어획이 가능해 식량 확보에 유리했습니다.

  3. 식물성 자원: 도토리, 잣, 칡뿌리, 야생 과일류(마가목, 산딸기 등)도 중요한 식재료였습니다.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물에 우려 저장하고, 뿌리식물은 구워서 섭취했습니다.

말갈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식재료를 확보하였으며, 지형을 고려한 이동식 식량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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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조리 방식은 환경과 이동성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1. 직화구이: 사냥한 고기를 나뭇가지에 꽂아 불 위에 직접 굽는 방식은 빠르고 에너지 효율이 높았습니다.

  2. 돌판·돌솥 조리: 불에 달군 돌판이나 돌솥 위에 고기나 뿌리를 익혀 먹기도 했었으며, 이는 생고기 섭취를 줄이고 기생충 감염을 막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3. 자연 냉장고: 겨울철에는 눈과 얼음 속에 고기를 묻어 보관했었으며, 이는 냉장기술이 없는 시대에 매우 유효한 방식이었습니다.

  4. 토기 이용: 발해 말갈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는 죽, 국, 끓인 음식 등 액체 기반 요리를 했음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말갈의 조리법은 단순함 속에 생존을 위한 위생과 효율이 내재된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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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철저한 유목민이었다는 통념과 달리, 일부 지역에서는 간헐적인 농경 활동도 수행했습니다.

  1. 재배 곡물: 조, 수수, 기장 등 내한성 곡물을 소규모로 경작한 흔적이 있었으며, 이는 옥저·고구려 유민과의 접촉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2. 채소류: 산야에서 자생하는 고사리, 취나물, 두릅 등을 채집하여 데쳐먹거나 말려 저장했었습니다.

  3. 식사 형태: 잡곡밥, 죽, 죽순과 고기 혼합 수프 등 복합 요리 형태도 가능했었으며, 일부는 음식에 소금이나 허브를 가미한 맛 조절도 시도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처럼 말갈의 식문화는 수렵 중심이면서도 농경민의 영향을 흡수한 하이브리드형 식생활로 발전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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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단지 먹고 배를 채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잔치와 의례에 필요한 음식 문화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술 제조: 수수, 기장, 조 등을 발효시켜 만든 곡물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었으며, 이는 고구려·발해의 풍습과 연계되는 문화입니다.

  2. 의례 음식: 사냥 후 동료와 함께 나누는 고기와 술, 겨울을 앞두고 축제처럼 행한 공동식사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사회적·종교적 기능을 가졌습니다.

  3. 발효 저장: 냄새와 곰팡이를 피하기 위한 간단한 발효 기술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고기 말리기와 장기 저장은 말갈 생존에 핵심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말갈이 음식을 단순 연료가 아닌 공동체 유대를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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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음식 문화는 생존의 도구인 동시에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1. 낭비 없는 소비: 사냥한 동물은 고기, 가죽, 뼈, 털까지 모두 활용했었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도 건조하거나 나눠 저장했었으며, 버려지는 자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2. 계절식 중심: 여름엔 생선과 채소, 겨울엔 고기 중심으로 자연의 순환에 따라 식단이 달라지는 계절 순응형 식생활을 유지했었습니다.

  3. 이동과 저장의 균형: 유목민적 이동성과 정착민적 저장기술을 동시에 갖춘 말갈의 음식 시스템은, 지속 가능성과 생존 효율성이 절묘하게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제로 웨이스트·로컬푸드 운동에 가까운 지속 가능한 방식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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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음식 문화는 단순한 원시적 식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굽고, 뿌리를 익히고, 곡물을 심고, 술을 빚었습니다.
그 속에는 자연에 대한 이해, 공동체의 유대, 생존과 창조의 경계선 위에서 쌓인 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있는 것을 활용하는 삶’,
‘시기와 환경에 맞게 먹는 삶’은 말갈이 수천 년 전부터 실천하던 방식이었습니다.

말갈의 식문화는 단순한 역사 정보가 아닙니다.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가에 대한 오래된 해답입니다.




2025년 6월 19일 목요일

발해는 누구의 나라였나? 말갈족과 함께 세운 고구려의 후예국 이야기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동북아시아에 다시 한 번 찬란한 문화와 국가 체제를 꽃피운 고대 왕국이였습니다. 그러나 발해의 성립 과정과 역사 속에서 **‘말갈’**이라는 민족의 존재는 종종 간과 됩니다. 과연 말갈족은 단순한 주변 부족에 불과했을까? 이 글에서는 발해의 창건자인 대조영과 말갈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갈족이 발해 건국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흥미롭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고구려의 계승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주체로 우뚝 선 발해와, 그 속에서 활약한 말갈족의 진면목을 지금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발해는 누구의 나라였나? 말갈족과 함께 세운 고구려의 후예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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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침공으로 고구려는 무너졌습니다. 고구려의 왕족과 귀족, 군사들은 각지로 흩어졌었고, 특히 동북방의 말갈 지역으로 피신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 시기 동북방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오지이자, 다양한 민족이 혼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말갈’이라는 이름의 종족이 있었으며, 이들은 고구려와 때로는 적, 때로는 동맹으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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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의 총칭 입니다. 현대의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중심으로 살았으며, 기마 전투와 산악 지형에 능했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고구려와 유사한 점이 많았었고, 일부 학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변방 민족으로 편입되거나 동화된 집단이기도 합니다. 즉, 말갈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그 계승 세력이 도피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자연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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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국자는 대조영이였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으며, 일부 사서에서는 ‘속말말갈’ 출신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대조영이 단순히 고구려계 인물이 아닌, 말갈족과의 깊은 연계를 가진 지도자였음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발해는 초기부터 고구려 유민과 말갈 부족 간의 군사적·정치적 연합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698년,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자주적 세력으로 부상했었고, 이후 동모산에 정착해 발해를 세웠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말갈족의 지원과 협력은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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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세워진 이후 말갈족은 단순한 협력 세력이 아니라 국가 체제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발해는 ‘5경 15부 62주’라는 정교한 행정 체계를 운영했었고, 이 가운데 많은 지방은 말갈계 부족이 관리하거나 거주했습니다. 말갈은 단순히 군사 집단이 아닌, 행정 관료와 상인, 농민으로도 역할을 수행하며 발해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말갈인들은 고위 관직에 올라 중앙 정계에도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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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말갈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융합한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이는 발해의 복식, 무기, 토기, 불교 양식 등에서 드러납니다. 말갈의 기마 문화는 발해의 군사력에 영향을 주었고, 토착 지식은 지역 통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말갈과의 융화는 발해가 주변 국가들과 독자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일본과의 교류에서도 말갈 출신 사절단이 활약했었으며, 이들은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로 평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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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역사에서 말갈족은 결코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후예와 말갈족의 융합은 새로운 국가, 발해를 탄생시킨 주된 원동력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품은 대조영은 말갈족과 함께 동북아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며, 중국 중심의 질서에 도전한 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발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에 있는 말갈의 존재와 그들의 기여를 반드시 조명해야 합니다. 오늘날 발해의 다민족 국가로서의 성격은, 한민족의 역사관을 넘어서 보다 포괄적이고 유연한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5년 6월 18일 수요일

일본 역사서에서 언급된 말갈 –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북방 세력


말갈(靺鞨)은 주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고대 북방 민족이지만, 그 흔적은 뜻밖에도 **일본의 공식 역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했음을 보여주는 단서 입니다. 본 글에서는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말갈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일본이 어떻게 이 북방 세력을 인식하고 대응했는지, 그 배경과 의도를 흥미롭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본 역사서에서 언급된 말갈 –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북방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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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는 797년에 편찬된 일본의 정사로, 697년부터 791년까지 약 9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입니다. 이는 『일본서기』의 후속 편으로, 당대 일본의 정치·군사·국제 외교 활동을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대륙에서 벌어지는 고구려 멸망, 발해 건국, 신라의 대외정책 등 굵직한 사건들을 일본 측 시각에서 관찰하고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방의 말갈에 대해 군사적 긴장감과 외교적 호기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말갈은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니라, 신라와 발해 사이에서 일본이 민감하게 반응한 변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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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는 말갈이 “말홀(靺鞨)”이라는 음차로 여러 차례 등장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말갈은 주로 신라나 발해와 갈등하거나 연합하는 세력으로 묘사되었으며, 일본에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8세기 초, 발해가 세워진 이후 말갈의 군사 행동이 일본의 북방 방위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속일본기』에는 말갈 세력이 동해를 건너 일본 북부(에조 지역 등)에 출몰하거나 일본과 접촉을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나 추측이 아닌, 실제 경계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줍니다.

일본은 말갈을 ‘오랑캐’로 단순화하지 않고, 자체 전략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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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국풍 문화’를 꽃피우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는 시기였었고, 동시에 대외 전략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말갈에 대한 관심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1. 발해의 등장과 팽창: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연합해 건국한 국가로, 일본 입장에서는 신라와는 또 다른 외교 대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발해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할 때, 일본은 그 배후 세력인 말갈의 움직임에도 주목했습니다.

  2. 북방 해상 경계: 『속일본기』는 말갈의 해상 활동을 경계한 일본이 북부 국경 방비를 강화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방어 차원이 아니라, 말갈의 군사 능력과 이동 경로를 실질적 위협으로 인식했음을 의미 합니다.

  3. 신라 견제 수단: 일본은 당시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말갈이나 발해와의 연대를 고민했습니다. 『속일본기』에는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해 말갈 세력과 협조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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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 나타난 말갈은 단순한 유목민 집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조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상 활동도 가능했던 민족으로 그려 집니다. 일부 기록에는 “말홀이 선박을 이용해 에조에 이르렀다”는 기술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말갈이 기동력 있는 해양 민족으로도 활동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중국 중심 사서에서 보던 내륙형 수렵민 이미지와는 다른 인식을 보여 줍니다. 일본은 말갈의 실질적 영향력을 경험하거나 보고 받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적 경계 대상이자 잠재적 외교 파트너로 바라본 것입니다.

또한, 말갈과 일본의 직접적인 외교나 교역의 증거는 부족하지만, 『속일본기』의 기록은 그 가능성과 경계를 모두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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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는 일본 내부 사건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외교 질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 입니다. 특히 말갈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1. 다각적 시각 제공: 말갈에 대한 중국과 한국 중심의 시각이 아닌, 제3의 외부 관찰자로서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국제정세 반영: 일본이 말갈을 통해 발해·신라와의 관계를 조율하려 했던 정세 흐름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3. 고대 동북아 연결망: 말갈이 단순한 내륙 부족이 아닌, 해상 활동을 통해 일본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세력임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곧 말갈이라는 민족이 단지 ‘변방의 유목민’이 아니라, 고대 동북아 국제정치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단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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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말갈은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닌,
일본이 실질적으로 주시하고 대응한 국제적 세력이었습니다.

  1. 일본은 말갈을 발해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변수로 인식했었고,

  2. 해상과 북방 국경의 위협으로 말갈을 경계했었으며,

  3.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동북아 질서를 읽고 외교 전략을 조정했습니다.

고대 동북아를 조망할 때, 말갈은 더 이상 중국·한국 역사서 속 부차적 존재가 아닙니다.
일본의 사서에 기록된 ‘또 다른 말갈’의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세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기록들 속 말갈을 능동적 역사 주체로 재해석하는 시각 입니다.

말갈족 복식문화 – 귀족층의 장신구와 사치품

보통은 수렵과 유목을 일삼는 거친 민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갈 내부에서도 귀족층은 존재했고, 이들은 자신만의 화려한 복식 문화와 장신구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모피와 가죽, 금속과 보석을 조화롭게 활용한 말갈의 복식 문화는 실용성과 미적 감각, 계급적 상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형태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고학 발굴과 사서 기록을 바탕으로, 말갈 귀족층이 사용한 장신구와 사치품, 그리고 그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고 싶어 적습니다..


말갈족 복식문화 – 귀족층의 장신구와 사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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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의복은 일반적으로 가죽과 모피 중심의 기능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민이나 전사들은 두꺼운 가죽옷, 털가죽 신발, 털모자를 착용해 혹한 속에서 사냥과 이동에 적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귀족층, 특히 말갈의 지배자 계급은 실용을 넘어서 장식성과 권위를 드러내는 복식을 선호했습니다.
예를 들어, 모피 중에서도 흑담비·은담비처럼 귀한 종류를 사용하거나, 가죽 옷에 금속 장식, 수(繡) 문양을 더해 시각적 위엄을 부여했습니다.

이러한 고급 복식은 발해 귀족 복장과도 연결되며, 말갈 상류층이 발해 귀족으로 편입되며 더욱 세련된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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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인된 말갈 계 귀족 묘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신구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 귀걸이: 은제, 금제, 동제 귀걸이. 일부는 유리 구슬, 산호 등과 함께 엮은 복합 장신구.

  • 목걸이: 뼈, 조개, 유리, 호박 등을 활용. 일부는 청동 장식이 더해져 ‘부의 상징’으로 기능.

  • 팔찌·허리띠: 금속 버클이 있는 가죽 띠, 장식이 달린 허리띠. 권력자의 상징으로 착용.

특히 곰 발톱·늑대 이빨 등 맹수의 흔적을 가공한 장신구는 ‘전사의 상징’이자 주술적 의미도 내포했다고 봅니다. 장신구는 단지 꾸미는 물건이 아닌, 신분, 정체성, 무속성을 모두 아우르는 요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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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족층의 복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머리 장식과 모자였습니다.

  • 머리에는 땋은 머리 위에 금속 핀을 꽂고, 은제 비녀나 장식핀으로 꾸몄습니다.

  • 머리끈에는 자개·옥·호박 구슬을 달았었고, 때로는 모피 테두리를 두른 모자도 착용했습니다.

  • 일부 유적에서는 관(冠) 형태의 금속 머리띠도 출토되어, 귀족 여성이 지닌 의례용 권위 상징으로 분석됩니다.

말갈 여성의 복식은 고구려·발해 여성과 유사하면서도, 북방 유목민의 색채와 주술적 요소가 가미되어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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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자급자족적 수렵민족이었지만, 동시에 활발한 무역과 외래품 수용도 이뤄냈습니다. 귀족층일수록 그 영향은 더 뚜렷했습니다.

  • 비단: 당나라·고구려·발해와의 교역을 통해 중국제 비단 직물을 사용.

  • 유리 구슬: 페르시아·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유리 공예품은 목걸이·머리끈 장식으로 인기.

  • 청자·금속 거울: 고분에서 발해식 거울이나 중국 청자 조각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치품은 단순 수입이 아닌 혼합문화 형성과 위계표현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말갈 귀족이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 국제 교류와 문화 수용의 주체였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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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귀족이 선호한 장신구에는 자연 숭배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 늑대 이빨·곰 발톱: 사냥의 상징, 남성성, 용맹함을 나타냄

  • 호박·옥: 풍요와 건강, 장수의 기원

  • 새깃털·나무껍질 조각: 샤먼(주술사) 문화와 연결된 장신구로 사용

이는 말갈이 단순한 치장 목적을 넘어, 장신구를 통해 자신과 자연, 조상, 정체성을 연결하고자 했다는 뜻입니다. 귀족일수록 이러한 ‘의례용 장신구’가 더 고급화·전문화되었으며, 정치·종교적 권위와 직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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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야인’, ‘유목민’이라는 편견과 달리, 자신만의 세련되고 상징성 있는 복식 문화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귀족층은 고급 모피, 금속 장신구, 외래품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드러냈었고, 그 안에는 자연과 신앙, 문화교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말갈 유물 속 장신구를 보면,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생존과 문화의 흔적, 정체성의 상징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그들은 입고, 꾸미며, 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말갈의 주거 문화 – 유목민인가, 정착민인가?

말갈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약했던 미스터리한 민족 중 하나로, 수렵과 전쟁, 때로는 농업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순한 유목민이었을까? 아니면 계절에 따라 이동하거나 마을을 형성한 반정착 생활자였을까? 『구당서』와 『삼국사기』, 고고학적 발굴 등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말갈의 주거 문화를 살펴보면,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목민'의 틀에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의 주거 양식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말갈의 주거 문화 – 유목민인가, 정착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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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에 대한 최초의 인상은 대개 '야인(野人)', 즉 유목 또는 수렵을 통해 살아가는 이민족이라는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구당서』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 말갈이 “산과 숲에 거주하며 사냥으로 살아간다”고 묘사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국과 신라의 입장에서 말갈은 체계적인 국가 질서나 농경 기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그려졌었고, 그 결과 이들은 **‘유랑하는 부족’**으로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기록자의 관점에 따른 편향일 수 있었으며, 실제 말갈의 생활은 더 복합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지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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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해와 말갈 관련 유적이 다수 발굴되면서, 말갈의 주거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흑룡강 일대와 요하 서쪽, 연해주 지역 등에서 발굴된 움집 유적들은 말갈이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말갈의 주거지는 흔히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이는 겨울의 혹한을 피하고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한 실용적 방식이었습니다. 내부에는 화로 흔적, 굴뚝 구조, 저장 공간 등이 발견되며, 이는 장기 거주를 염두에 둔 설계로 해석됩니다.

즉, 말갈은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는 ‘이동형 유목민’이라기보다, 특정 지역에 자리 잡고 반정착적으로 생활한 '정착 기반의 수렵민족'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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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갈이 완전히 정착 생활만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당서』 등 일부 문헌과 유적 분석을 종합하면, 말갈은 사계절에 맞춘 주거지를 달리한 흔적도 보입니다. 겨울철에는 깊은 산간 움집에서 생활하였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강가나 평지로 이동해 어로·수렵 또는 간헐적 농업을 병행했던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몽골 고원 유목민의 천막 이동형 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상 이였습니다. 말갈은 말과 가축을 키웠지만, 완전한 유목 중심이 아닌 자연 환경에 적응한 복합 생존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그들은 “정주민도, 유목민도 아닌 그 중간에 존재했던 민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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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운 점은 말갈이 농경을 병행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입니다.
특히 발해 초기 말갈 세력의 일부는 **옥저·고구려 유민과 혼거(混居)**하며, 밭작물 재배에 참여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괭이·낫·곡식 저장구덩이 등은 그들이 최소한 자급자족을 위한 농경 활동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말갈이 농경을 통해 저장 능력을 확보하였고, 그것을 통해 겨울을 대비했다는 점은 단순 수렵민이 가질 수 없는 조직력과 기술력의 증거입니다. 즉, 말갈은 생존 전략을 위해 필요시 정착하며 농경까지 시도한 유연한 민족이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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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주거 양식은 단순한 생존 방식 그 이상이 였습니다.
그들의 집터는 가족 단위 혹은 소규모 집단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특정 지형에 따라 마을을 형성한 흔적도 있습니다. 이는 말갈이 느슨하나마 혈연과 거주지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사회를 운영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일부 말갈 집단은 성벽이나 방어 시설을 갖춘 구획을 이루기도 했었으며, 이는 외적에 대한 방비 또는 상호 간의 교역과 권력 구조 형성 가능성을 시사 합니다.

결국 말갈의 주거 문화는 그들의 정치·사회적 조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은 단지 야성의 민족이 아닌 나름의 질서를 가진 복합 공동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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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단순히 유목민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움집을 짓고, 때로는 밭을 일구며, 겨울에는 산속에, 여름에는 강가에서 살아갔습니다. 정착과 이동, 수렵과 농경, 공동체와 자율성. 말갈의 주거 문화는 이 모든 것이 공존한 융합형 생존 양식의 표본이었습니다.

말갈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 반드시 단일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배울수 있습니다.
말갈은 경계에서 살았고, 경계를 넘었으며, 경계 자체를 유연하게 만든 민족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을 ‘야만적 유목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역사와 자연 사이에서 균형을 찾은 지혜로운 공동체로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때 입니다.

동북아 고대 민족 탐구: 말갈과 거란의 뚜렷한 차이점

동북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말갈과 거란은 종종 비슷하게 묶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른 문화를 지닌 민족이었습니다.

비슷한 지리권에 살았었고, 여러 제국과 교류했지만 이들의 언어, 생활 방식, 정치 구조, 문화 정체성은 분명하게 달랐습니다.
본 글에서는 ‘말갈’과 ‘거란’이라는 두 고대 민족을 비교하며, 서로 어떤 차이를 가졌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
숲과 산의 수렵민 말갈, 초원의 제국 거란—이들의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습니다.


동북아 고대 민족 탐구: 말갈과 거란의 뚜렷한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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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갈(靺鞨)**은 주로 퉁구스계 민족으로 분류됩니다. 오늘날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에 살았으며, 북방 숲 지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예맥·옥저계열과도 연결되며, 고구려, 발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거란(契丹)**은 일반적으로 몽골계 또는 몽골-튀르크 혼합계로 봅니다. 주 활동 무대는 랴오둥·내몽골 초원지대로, 유목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부족입니다. 후에 거란은 요(遼)나라를 세워 황제국을 수립했었습니다.

👉 요약하면, 말갈은 산림 퉁구스계 수렵민족, 거란은 초원계 몽골 유목민족이라는 뚜렷한 혈통·문화적 출발점의 차이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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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갈족은 수렵과 어로, 일부 농경을 병행했었습니다. 눈 덮인 숲에서 사냥, 물고기 잡이, 채집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겨울철에는 사슴 가죽 옷을 입었었고, 스키처럼 만든 눈신을 이용해 산짐승을 쫓았었습니다.

  2. 거란족은 전형적인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양, 말, 소, 낙타를 키우며 초원 위를 이동하며 살았었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어릴 때부터 익혔습니다. 천막(게르)을 이동식 거처로 삼아 기동성이 뛰어난 생활 구조를 가졌습니다.

말갈이 산림형 정착-이동 복합형, 거란은 초원형 순유목형이라는 점에서 환경과 문화 적응 방식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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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갈은 여러 부족으로 나뉜 자율적 연합체였습니다. 흑말갈, 백말갈, 속말말갈 등 지리적·문화적 구분이 존재했었고, 외부 지배를 받거나 스스로 독립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발해 성립 이후에는 발해에 흡수되어 행정 관료화되기도 했습니다.

  2. 거란은 8~9세기를 지나면서 중앙 권력이 강한 군주제적 체제로 전환되었고,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 하며, 황제국 체제를 수립했었습니다. 이후 거란족은 중국식 관료제와 유목 전통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동북아의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말갈은 유연한 부족 중심 체계, 거란은 집권적 제국 체계라는 정치 문화 차이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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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갈족은 샤머니즘 기반의 자연 숭배 신앙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곰신앙, 태양신, 조상 숭배 등 자연과 밀접한 종교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무당(샤먼)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 거란족은 유목 문화의 다신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불교와 도교를 국가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요나라 시기에는 수도에 대규모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중화 문명의 종교를 공존적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

말갈이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신앙을 오래 유지한 데 반해, 거란은 정복자이자 제국의 종교 전략가로서 복합 종교를 수용하며 유연하게 확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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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갈은 강한 체력과 험지에서의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산악·수로 병력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고구려나 발해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었고, 기습과 유격전에 능했습니다. 단, 대규모 정복 전쟁보다는 보조 전력으로 활약했습니다.

  2. 거란은 뛰어난 기병 전력과 유목 기동성을 앞세워 송나라와 요서 일대를 위협했습니다. 전략적으로 ‘기병 국가’의 본령을 이어받아 천리 원정과 대제국 경영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처럼 말갈은 환경 특화형 병종, 거란은 대륙형 공격 기병 제국이라는 군사 전략의 차이를 지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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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과 거란은 모두 동북아 변방에서 성장했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마치 산과 초원처럼 대비적이었습니다.

비교 항목 말갈 거란
계통 퉁구스계 몽골계 (혼합)
생활 방식 수렵·어로·농경 유목·기마 중심
정치 체제 부족 연합 중앙집권 제국
종교 샤머니즘 중심 불교·도교 혼합
군사 특징 산악 병력·유격전 기병 중심 정복 군대

말갈은 산림과 자유를 중시한 생존 민족,
거란은 제국을 경영한 초원의 전략가였습니다.

이들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의 민족도 단순히 ‘이민족’이나 ‘오랑캐’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하고도 독립적인 문화와 논리를 가진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갈과 거란—그들은 서로 다른 땅, 다른 신념을 가진 두 개의 고대 세계였습니다.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말갈족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특유의 경제활동을 통해 넓은 지역과 교류한 실력 있는 자생 집단이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교역 활동은 말갈 사회의 생존 뿐 아니라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