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7일 금요일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말갈족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특유의 경제활동을 통해 넓은 지역과 교류한 실력 있는 자생 집단이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교역 활동은 말갈 사회의 생존 뿐 아니라 발해와 고구려 같은 국가와의 관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문에서는 말갈의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계 방식과 당시 동북아 무역 구조 속에서 의 위치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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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은 **수렵(사냥)**이었습니다. 동북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울창한 삼림 지대는 사슴, 멧돼지, 곰, 늑대 등 다양한 야생 동물이 서식하던 곳으로, 말갈인들은 사냥을 통해 식량, 가죽, 뼈, 약재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활과 창, 덫을 사용해 사냥했으며, 눈 덮인 산림지대에서는 설피와 썰매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이동했습니다. 사냥한 동물의 가죽은 방한용 의복과 덮개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발해나 당나라로 무역품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특히 호랑이 가죽과 곰 발바닥 등은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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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더불어 말갈족은 소규모 목축 생활도 병행했습니다. 기후와 지형상 대규모 유목은 어려웠지만, 소, 양, 말 등 가축을 기르며 이동형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말은 교통 수단이자 전쟁 자산이었고, 양과 소는 식량과 피복 재료를 제공했습니다.

말갈 여성들은 유제품 가공 능력이 뛰어났으며, 젖을 짜서 만든 유청 이나 버터는 중요한 식료 자원이 되었다. 특히 말의 사육과 기마술은 후대 몽골 유목민 보다 먼저 체계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말갈족의 기동성과 생존력을 보여주는 증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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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생계는 아니었지만, 일부 말갈 부족은 밭농사와 원시 농경도 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 유역이나 훈춘 평야처럼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는 기장, 조, 수수 등 잡곡을 재배했습니다. 말갈 사회는 기본적으로 유목적 특성을 가졌지만, 계절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숲에서 약초, 열매, 버섯 등을 채집해 일상의 영양을 보충했으며, 이는 자급자족형 경제 구조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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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경제는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서 교역 경제로 발전했다. 특히 발해 건국 이후, 말갈인들은 발해라는 국가적 틀 속에서 적극적인 교역 활동에 참여했다. 말갈은 가죽, 수렵물, 인삼, 사향, 호랑이 뼈 등을 생산하여 발해의 주요 수출품으로 공급했다.

발해는 이 물품들을 중국(당나라), 일본, 거란, 흑수말갈 지역에 수출하며, 동북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말갈인들은 직접 무역상으로 참여하거나, 수공예품 제작자 및 운반자로 활약했다. 말갈의 활솜씨와 체력은 이들이 장거리 교역로를 개척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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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경제활동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닌,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핵심 기제였다. 수렵이 중심이 되었던 초기 말갈은 전사 중심의 사회 구조를 보였으나, 발해 건국 이후 교역과 농경, 수공업의 발전으로 계층 구조가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발해에서는 말갈 귀족층이 형성되어,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고, 경제 활동을 통한 지위 상승이 가능했다. 이는 말갈족이 단순한 피지배 민족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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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거칠고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무역과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킨 민족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기동성과 생활력으로 고대 동북아에서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고, 발해의 경제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말갈의 경제활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히 변방 민족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고대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 말갈의 활력 있고 입체적인 실체를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말갈 여성의 사회적 지위 – 발해 여성 귀족과의 관계

고대 동북아시아의 말갈족은 발해 건국에 있어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핵심적인 주체였습니다. 이들의 문화 중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말갈 여성은 단지 가정 내 역할에 그치지 않고 종교, 정치, 경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말갈 여성의 전통적 지위와 발해 귀족 여성으로서의 변화,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하겠습니다.


말갈 여성의 사회적 지위 – 발해 여성 귀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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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유목과 농경이 혼합된 생활 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사회는 가부장 중심이었지만 여성의 실질적인 영향력 또한 매우 컸습니다.

특히 무속 신앙에서 여성 무당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말갈 여성은 주술, 제사, 치유 행위 등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단순한 가정 보조 역할을 넘어 공동체 지도자급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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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말갈의 문화와 사회 구조는 발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여성의 사회적 위상입니다.

발해에서는 여성도 토지를 소유하거나 사찰을 후원하고, 일부는 귀족 작위를 부여 받기도 했습니다. 말갈 출신 여성들이 발해 상류층에 편입되며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말갈 여성의 자주성 과 활동성이 발해 귀족 여성의 정체성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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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과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 고분과 묘지명 에는 여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여러 기록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 묘는 여성의 교양과 공적 활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 예술, 불교 신앙에 깊이 관여했으며, 묘지명 에는 “지혜롭고 덕망이 높은 공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발해 사회에서 여성이 단순한 ‘가문의 딸’이 아닌 독립적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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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초기에는 말갈 부족과의 연합을 위해 혼인 외교가 자주 이루어졌습니다. 말갈 여성은 단순한 혼인 상대가 아니라 정치적 중재자, 지방 통제의 매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말갈 귀족 여성들이 발해 귀족과 혼인하며 말갈계 혈통이 발해 지배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는 정치적 안정과 부족 간 연합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일부 여성은 자신의 친족 부족과 발해 왕실 사이를 연결하는 외교적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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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여성의 영향력은 단지 고대 사회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리더십, 경제적 기여, 정치적 중재력은 현대 다문화 사회의 여성 리더십 모델로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다민족 국가였으며, 그 안에서 말갈 여성은 고유의 문화와 역할을 지키면서도 발해 귀족으로 통합되는 융합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의 젠더 다양성과 다문화 포용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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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여성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드물게도 주체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발해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핵심적인 역사 주체로 기능했으며, 발해 여성 귀족 문화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사 연구를 넘어, 여성사와 다문화 융합의 역사적 근거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갈 여성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더 넓은 동아시아의 여성 리더십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25년 6월 26일 목요일

말갈 유적지 탐방 – 현재의 중국 지린성과 연변 지역

말갈족(靺鞨族)은 발해 건국의 핵심 세력이자 고대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민족이었습니다.  흑수말갈, 속말말갈 등 다양한 계열이 존재했으며, 특히 속말말갈은 발해 건국의 주역으로 활동했습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말갈인의 삶과 문화가 남아 있는 유적지가 다수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풍부한 말갈 유적지를 중심으로, 고대 말갈의 삶을 현재의 시선으로 탐방해보고자 합니다. 발해와 말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것입니다.


말갈 유적지 탐방 – 현재의 중국 지린성과 연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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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맞닿은 지역입니다. 대조영이 속말말갈 세력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뒤, 이 지역에서 발해를 세웠다는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린성 내 주요 말갈 유적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용두산성: 말갈계 부대가 주둔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대 산성

  • 혼강 주변 고분군: 초기 발해 귀족과 말갈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

  • 고구려성과 연결된 방어시설: 말갈-고구려 간 군사 협력의 흔적

이들 유적은 고구려의 석축 기술과 말갈의 간결하고 실용적인 구조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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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말갈족의 주거지 중 하나로, 흑수말갈이 이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농경과 수렵을 병행하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자연환경이 풍부한 산악과 강 유역은 말갈의 반유목적 문화와도 잘 맞았습니다.

연변의 주요 말갈 유적지:

  • 연길 시 외곽 고분군: 목곽분 형식의 무덤이 집중 분포

  • 도문 일대 취락 유적지: 발해-말갈 초기 공동 거주지로 추정됨

  • 말 장비·사냥도구·청동기 출토지: 말 위주의 생활과 자급자족적 삶을 보여줌

이들 유적은 현지 박물관과 연변대학 등에서 보존·전시 및 학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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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유적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역사에서 말갈족이 단순한 종속 세력이 아닌, 문화와 군사에 있어 주체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말갈 유적이 지닌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다민족 융합의 상징: 고구려·말갈·발해 간 문화적 교류의 현장

  • 기마 문화의 시초: 말갈의 말 관련 유물은 몽골보다 앞선 기술력을 시사

  • 환경 적응력: 산림과 강변에 최적화된 마을 구조, 방어 시설, 생존 도구 등

최근에는 말갈 유적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재조명되며, 중국 내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역사 관광 자원화도 추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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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유적지를 직접 둘러보려는 여행자들을 위한 유용한 팁을 소개합니다:

  • 여행 허가: 지린성과 연변 대부분은 외국인 출입 가능, 국경 근처 일부 지역은 제한

  • 언어: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로 한국어 사용 가능성이 높음

  • 가이드 활용: 현지 박물관 또는 조선족 문화센터에 문의 시 역사 가이드 가능

  • 여행 시기: 4~10월이 적기, 겨울은 매우 춥고 일부 유적 접근이 제한됨

역사를 사랑하는 여행자에게는 말갈 유적지 탐방이 단순한 관광을 넘어, 고대의 시간과 숨결을 마주하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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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발해 건국의 협력자이자, 고대 동북아의 문화 주역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산성, 무덤, 유물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채워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오늘날 지린성과 연변에 남은 말갈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과거의 민족과 현재의 공간이 맞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 말갈의 삶과 숨결이 남아 있는 길 위로 떠나보세요.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말갈족에서 이어진 여진과 만주족의 문화 – 동북아 고대 문명의 연속성

 말갈족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부족 연합체로, 그들의 문화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여진족과 만주족으로 이어지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말갈의 생활 방식, 종교, 사회 제도, 무예 전통은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에게 계승되어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바꾸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에서 시작해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과 현대까지 남아 있는 유산을 살펴보겠습니다.


말갈족에서 이어진 여진과 만주족의 문화 – 동북아 고대 문명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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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주로 만주, 연해주, 간도 지역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고구려 및 발해와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습니다:

  1.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한 정신문화

  2. 수렵과 기마 중심의 생활 방식

  3. 도기 제작과 복식 등 독자적 물질문화

  4. 부족 연합체 구조

이러한 말갈의 사회적 구조와 생활 방식은 이후 여진족의 정치적 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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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경, 말갈족에서 분화된 여러 부족들이 뭉쳐 여진족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들은 송나라와 교역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말갈의 문화를 뚜렷이 계승하였습니다.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샤먼 제사와 조상 숭배의 전통

  2. 말갈식 복장과 무기 사용 (특히 활과 기마 전투 기술)

  3. 부족 중심의 정치 구조

여진은 말갈의 부족 연합체 체제를 발전시켜 강력한 군사력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금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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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년, 아골타가 여진 부족을 통합해 금나라를 세우면서 말갈 문화는 한족 문화와 융합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초기 금나라는 말갈과 여진 전통을 적극 유지했습니다.

  1. 헌사, 사냥제 등 전통 의례 유지

  2. 말갈식 토기와 무기 사용

  3. 샤머니즘 기반의 국가적 제사

이 시기에는 말갈과 여진의 문화가 국가 수준에서 제도화되며, 그 정신이 점차 중화 문명과 섞여가던 과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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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여진족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고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칭합니다. 이후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로 발전,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도 말갈의 문화는 중요한 뿌리로 작용했습니다:

  1. 팔기제도: 말갈 부족 연합체를 모태로 한 군사·사회 조직

  2. 샤머니즘: 청 황실도 중요한 행사에서 샤먼 의례를 수행

  3. 복식, 언어, 기마 전통: 말갈 → 여진 → 만주로 이어진 핵심 문화

  4. 사냥과 조상 제사: 정기 사냥 행사와 조상 숭배가 국가 의례로 제도화

청나라 황실은 이 전통을 “만주의 정체성”으로 내세워 한족과 구분지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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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이 문화의 흔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1. 중국 동북부 소수민족 축제에서 말갈-만주 복식과 전통무예 재현

  2. 샤먼 의식, 조상 제례 등 민속 종교 형태로 전승

  3. 언어 연구를 통한 문화 연속성 확인 (말갈어-여진어-만주어 계보)

  4. 기마 활쏘기, 수렵무예를 보존한 민속 체험 프로그램

이러한 문화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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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단지 고대 부족이 아니라, 여진과 만주족을 거쳐 금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동북아 제국의 뿌리입니다. 말갈의 문화는 정치 제도, 무예, 종교, 복식, 언어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민속 문화와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갈에서 시작된 문화의 연속성은 동북아시아 고대 문명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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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샤머니즘과 종교 – 자연과 혼령이 살아 있는 세계관

고대 동북아의 부족 중 말갈족은 뛰어난 기마 전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지배한 것은 무기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감, 즉 샤머니즘이었습니다. 말갈족은 자연 속에 깃든 정령들과 조상을 숭배하며, 영혼과 대화하는 무당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질서와 치유, 예언을 이끌어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의 샤머니즘이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어떤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는지를 살펴봅니다.


말갈족의 샤머니즘과 종교 – 자연과 혼령이 살아 있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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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종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산, 강, 바람, 불, 동물에 신령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생존과 안녕을 추구했습니다. 사냥 전에는 사냥감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물가에서는 수신(水神)에게 제를 올리는 등, 일상과 신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 숭배는 북방 샤머니즘의 핵심 요소로, 말갈족의 종교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중심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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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 사회에서 무당(샤먼)은 단순한 주술사가 아닌, 영적 지도자, 공동체 치유자, 예언자로서 매우 높은 위상을 지녔습니다. 주로 여성인 무당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길흉을 점치고, 조상신과의 소통을 통해 마을 전체의 안녕을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권위는 없지만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인물로 기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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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계절에 따라 집단 제사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봄에는 풍요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고, 가을에는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례가 치러졌습니다. 이때 무당은 신 내림을 통해 춤, 노래, 동물 희생 제물로 신의 뜻을 전하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불을 피우고 말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은 시베리아와 퉁구스 샤머니즘과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갈의 종교가 북방계 샤머니즘의 원형 중 하나임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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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죽음을 끝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덤에는 도기, 무기, 음식 등을 함께 묻어 사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부 무덤에서는 말을 함께 순장한 사례도 발견되는데, 이는 영혼이 말을 타고 저승을 여행한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조상숭배가 활발했던 말갈 사회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끊임없이 소통하는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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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세웠고, 그들의 종교적 전통은 발해 초기의 국가 의례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발해의 천제(天祭)나 궁중 제의, 고분 벽화 등에는 말갈 특유의 동물적 문양, 자연 숭배 요소가 드러납니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제사용 토기, 동물상은 말갈의 샤머니즘이 국가 체계 안에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갈의 종교가 단지 부족 신앙에 그치지 않고 고대 국가 형성에도 기여했음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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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샤머니즘은 단순한 주술 체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깊은 정신문화였습니다. 이들은 무당을 통해 영혼과 소통하고, 제사를 통해 자연과 공존했으며, 조상과의 연결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말갈의 종교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생태적 사고와 공동체 중심적 세계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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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요일

말갈의 토기와 도자기 – 독자적 문명의 흔적

우리는 종종 말갈을 고대 한국사 속 ‘변방의 부족’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발굴은 이들이 단순한 유목 집단이 아닌, 독자적 문화를 지닌 문명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토기와 도자기 유물은 말갈인의 삶과 신앙,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의 토기·도자기를 중심으로 그들의 문명적 흔적과 독립적 정체성을 재조명합니다.


말갈의 토기와 도자기 – 독자적 문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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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과 상징성의 결합입니다. 흙을 구워 만든 무유(無釉)의 토기는 대부분 회색 또는 적갈색으로, 형태는 항아리, 항아리형 병, 조리용 토기 등으로 구성됩니다.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일부 손잡이나 장식부는 동물 형상을 띠며, 이는 샤머니즘과 관련된 신앙적 요소로 해석됩니다. 토기는 단순한 생활 도구를 넘어, 말갈인의 정신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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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과 연해주 일대의 말갈 고분에서 출토된 도기들은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서, 제사나 장례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뚜껑 위에 소형 토기를 올려놓은 복층 구조의 항아리입니다. 이러한 복합형 도기는 말갈 사회가 제의 문화를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물증입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도기의 구조에 녹아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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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는 고구려나 발해 도자기와 비교했을 때 유약 처리가 없고, 상대적으로 거칠며 원형미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기술 부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중시한 문화적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초기 발해 도자기에서 말갈식 문양이나 형태가 나타나는 점은 말갈이 발해 형성에 문화적 기초를 제공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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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토기에는 물결무늬, 점렬문, 나선형 선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물, 하늘, 태양, 순환과 같은 자연 현상 또는 종교적 상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바닥에 새겨진 나선 문양은 ‘환생’이나 ‘영혼의 이동’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토기의 문양을 해독하면 말갈인의 우주관과 자연 숭배 사상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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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농경과 수렵·어로를 기반으로 한 복합적 삶을 영위한 자생적 사회였습니다. 그들의 도자기 문화는 주변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인접 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동북아 고대 문명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기능했습니다. 말갈을 문명의 ‘수용자’가 아닌 ‘창조자’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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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토기와 도자기는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그릇 하나하나에는 말갈인의 삶의 방식, 세계관,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고대의 흔적일 뿐이지만, 이들은 당시 사회의 구조와 문화적 깊이를 오늘날에 전해주는 생생한 언어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갈을 단지 변방의 부족이 아닌, 고유한 문명을 이룬 주체로 다시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2025년 6월 23일 월요일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 – 발해 귀족층 분석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융합으로 탄생한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발해의 귀족층은 ‘고구려계’ 위주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과연 말갈족은 단지 피지배 계층이었을까? 실제로 발해의 왕족과 고위 관료들 중에는 말갈계 인물들이 다수 존재했었고, 국가의 핵심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발해 귀족층의 구조와 다민족적 특성을 분석해보겠습니다.


말갈족 출신 왕족과 귀족들 – 발해 귀족층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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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이었지만, 그의 출신 부족인 속말말갈은 사실상 말갈계였습니다. 이처럼 건국 초기부터 말갈 세력이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나라와 일본의 기록에서도 발해를 ‘말갈(靺鞨)의 나라’로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외부에서 보기에 발해의 정체성이 고구려계뿐 아니라 말갈계의 강한 색채도 지니고 있었음을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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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왕족인 대씨 가문은 흔히 고구려계로만 분류되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그 뿌리를 속말말갈에서 찾습니다. 특히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중국 사서에 ‘말갈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씨 왕조 자체가 말갈적 요소를 기반으로 출발했음을 시사합니다. 이후 대조영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왕위를 이어가며 발해를 통치했었고, 이 과정에서 말갈계 왕족이 공식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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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정교한 관료제를 갖춘 국가였으며, 중앙정부와 지방 관료층에서 말갈 출신이 활약한 기록이 다수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발해의 지방 관료 중에는 흑수말갈·백산말갈 출신 인물들이 발탁되었으며, 이들은 지방 통치와 군사 방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발해가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계를 갖추는 과정에서 말갈 귀족의 통치 역량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 수용이 아닌, 실질적 권력 분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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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속일본기》 등 외교문서에는 발해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명단이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이 명단을 분석해보면, 대씨 외에도 ‘고’, ‘장’, ‘이’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말갈계로 추정됩니다. 특히 발해 사신 중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능숙히 구사한 말갈 출신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어, 국제 외교에서도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갈 귀족층은 단지 내부 통치뿐 아니라 외교적 얼굴로도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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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귀족층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발해의 독자적 색채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발해 불교 사찰 유적이나 고분 벽화 등에서는 고구려 계승 양식과 함께 말갈 고유의 복식, 무기, 의례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특히 여성 귀족 복장에서 나타나는 모피나 금속 장식, 의례에서 사용된 토템 형상은 말갈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입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고구려 후계 국가가 아닌, 고구려와 말갈이 융합된 새로운 국가였음을 뒷받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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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은 발해에서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니라, 건국의 주체이자 통치의 동반자였습니다. 왕실부터 지방 귀족까지 말갈계 인물들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발해의 정치를 이끌었었고, 외교와 문화의 중심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민족 통치 구조는 발해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고구려 중심으로만 해석하기보다, 말갈계 귀족층의 실질적 기여를 조명함으로써 더 입체적이고 풍부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말갈’을 다시 읽어야 할 때 입니다.




말갈의 경제활동 – 수렵, 목축, 무역의 민족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말갈족은 단순한 변방 민족이 아니라, 특유의 경제활동을 통해 넓은 지역과 교류한 실력 있는 자생 집단이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수렵과 목축,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교역 활동은 말갈 사회의 생존 뿐 아니라 발...